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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님 (@Pleasure_Dip)

푸른 하늘이 검게 변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사라지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속으로는 온갖 근심거리를 다 가져와 걱정을 한다.

 

"살아, 살아서 돌아와."

 

오늘은 7월 14일, 오전 12시였다.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 안 좋았다,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처럼. 에버렛은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기 까지 약 0. 3초가 걸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본부에 가기 위해 준비해놓은 정장을 차려입고 미리 닦아 놓았던 구두를 신고 집을 나와, 집 근처에 있던 카페에서 주문했던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제 차로 들어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곤 뒷좌석에 숨어있는 한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숨어있었습니까."

"약 4시간 전부터."

 

 

4시간 전부터라 하면, 에버렛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이 미친 남자가. 그는 에버렛의 욕에도 그저 방긋 웃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회의 도중 갑자기 툭 튀어나와 키스를 하고 사라지는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었다. 그런다고 기습키스가 익숙하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에버렛은 뒷좌석에 누워있는 그는 한심한 눈으로 몇 초 쳐다보곤 운전을 시작했다. 집에서 본부까지 가는 데에는 30분도 걸리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일상이었던 에버렛이지만, 이제는 뒷좌석에 누워있는 남자 때문에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지만, 둘 사이에서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색한 침묵을 깨는 이는 누워있는 사람이었다.

 

"에버, 오늘 시가..."

"없어요, 오늘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 그럼 우리 데이트는... "

"지금 데이트가 중요합니까, 지구 지키는 게 중요합니까?"

 

남자는 지구라는 말이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에버렛은 아차하며, 아직 바뀌지 않은 신호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미안해요, 라고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가 누워있던 자리에는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내 사랑 에버.* 라 적혀있는 종이 한 장만이 남아있었다. 이 종이는 그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라진 남자를 더 걱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망할, 마법사. 모닝 키스를 해주고 가라고. 에버렛은 허전한 입술을 어루어 만졌다.

 

****

 

"카터, 오늘이 13일이던가?"

"네, 혹시 내일이나 오늘 일정이 있으신가요?"

"아니야, 그냥 내일이 14일이 맞나 싶어서."

 

 

그의 비서였던, 카터는 에버렛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 봉투를 건넸다. 산까지는 아니지만 낮은 언덕처럼 쌓인 서류 위에 또 다른 서류가 올라오는 것을 본 그는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쉬었고, 그녀는 익숙한 듯 일이 날이 가면 갈 수록 늘어나네요, 조금은 쉬면서 하세요. 라며 위로를 해주었다. 에버렛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CIA에 그녀같이 일 잘 하는 사람만이 모여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스, 긴급 소집입니다."

"... 알았어."

 

힘들게 발을 떼어 회의실에 도착하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분위기가 평소보다 어두웠다. 국장이 착석한 후 모든 이들이 착석을 완료하자 이내 불투명한 화면이 생기며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바퀴 모양의 배? 우주선과 엉망이 되어가는 뉴욕 영상이 있었다.

 

"화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뉴욕에서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

 

에버렛은 영상을 돌려 보며 뉴욕의 상황을 자세히 확인 중이었다,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럴 때일 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차분함과 정확성이었기에.

 

"그리고 뉴욕에 있던 히어로들이 적과 대립 중입니다."

"누구 누구지? "

"닥터 스트레인지, 헐크, 아이언맨, 그리고 누군지 모르겠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일행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날 뻔했던 것을 겨우 참고는 주먹을 쥐었다 피는 것을 반복했다. 닥터 스트레인지, 본명은 스티븐 스트레인지, 전 최고의 천재 신경계 의사. 현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사를 그만두고 자취를 감췄다가 지구를 다른 차원과 우주로부터 지키는 영웅, 마법사, 소서러 수프림으로 나타난 남자. 그리고 에버렛의 연인. 아침마다 씻는데 불쑥 찾아와 키스하고, 회의하는데 머리에 꽃을 올리고, 업무 보는데 생텀으로 마음대로 데려와 장난치는 그런 사람이. 지금 눈 앞에 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날 걸 알고 있으면, 좀 말하라고."

 

스티븐 스트레인지.

 

 

위험한 일이 있고서, 약 4일이 지났다. 어째서인지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물어보았으나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했다. 에버렛은 생각했다, 그 역시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먼지가 되었을 뿐 남자는 곧 돌아올 것이라 믿고 또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포기하고 좌절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주머니에서 은색 빛의 반지를 꺼내어 그것만을 만지작거리며 남자를 기다리며, 옛 과거를 회상했다.

 

 

‘이게 뭡니까? 갑자기 반지라니.’

‘오, 에버. 모른 척하지 말게. 뭔지 알고 있잖나.’

‘... 결혼반지는 아니겠죠?’

‘정답이네, 에버. 지금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하기로 하는 거야.’

‘취향도 참. 알겠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지켜보자고요.’

 

 

에버렛은 터덜터덜 죽어가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중얼거렸다. 거리에는 망가진 자전거와 나무에 박아 엉망이 되어버린 자동차. 다 찢어져 읽을 수 없는 전단지가 바람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없었다, 원인도 모르고 소중한 사람이 사라져가는 것을 목격했으니 자기 자신도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몇몇 아이들은 나가고 싶다며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그 수도 많지 않았다. 에버렛은 걷다 엉망이 되어버린 한 집을 찾아 마당에 들어섰다. 결혼하면 같이 살 거라며 남자와 같이 고른 집이었다. 지금은 망가져버렸지만.

 

“엉망이네. 예쁜 집이었는데.”

 

그는 떨어지는 나뭇잎을 주우며 마당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른 꽃부터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도. 아침부터 시작한 것이 시간이 지나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 마당을 치우고, 집을 청소하고 치우고 청소하고를 반복하니 어느새 1년이 더 지나가있었다. 오늘도 에버렛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과 없는 회사로 출근하고 일하기를 반복했다. 허나, 오늘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오늘만큼은 남자가 돌아올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다. 물론 에버렛은 이것을 무시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일이었기에 일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느낌만이 이상하고 평화로울 것 같았던 하루가 한동안 울리지 않았던 경보 알림으로 깨졌다.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한 모니터를 통해 지지직거리는 영상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망가지기 직전의 CCTV가 보내는 영상인 것 같았다. 영상 속에서는 히어로들과 보라 괴물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장소가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 검은 화면뿐이 안 보였다. 에버렛은 기억을 떠올렸다, 잠시뿐이지만 영상 속에 보였던 주황빛을. 불똥처럼 튀기는 빛나는 주황빛을 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남자가 돌아왔나? 라는 의문으로 가득 찼다. 지금이라도 당장 어디인지 모를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경비원들의 지시 때문에 가지 못했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경보 알림이 끝나자마자 에버렛은 서둘러 짐을 챙겨 먼저 갈게라는 말만 하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에버렛은 30분을 달리고 달려 한 건물에 도착했다. 남자와 함께 살기로 했던 집이었다, 예전보다는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집. 이 시간에 본디 꺼져있어야 하는 거실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혹은 남자가 돌아왔다.’

 

에버렛은 긴장되는 마음을 추스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현관에서 보는 거실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항상 차가운 거실이 아닌 어딘가 따뜻하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거실이었다. 그는 천천히 현관에서 거실로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거실에 도착하고 고개를 돌리니 그리워했고 기다렸고 사랑하는 한 사람이 에버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막 정리한 것 같은 엉망인 머리와 수염. 찢어졌지만 여전히 이상해 보이는 옛날 사람이나 입을 것 같은 옷. 떨리는 흉터 난 두 손으로 에버렛의 두 뺨을 감싸는 키가 큰 남자. 닥터 스트레인지. 에버렛의 애인 스티븐 스트레인지였다. 남자는 에버렛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제 품 속으로 꼭 껴안았다.

 

“오랜만이네, 에버.”

“2년 동안 모습 감췄으면서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겁니까?”

“여전히 까칠하네, 내 장미.”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안했어요!”

 

남자는 에버렛이 소리를 치며 때려도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다 더 세게 맞으면 ‘에버, 아프네.. 힝..’ 이라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평소의 에버렛이었다면 인상을 쓰며 욕을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2년 만에 만나는 둘이기에, 때리면서도 애교를 들으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때리다 고통이 멈추니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버렛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귀여운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지는 것을 보니 남자는 놀라 허둥지둥거렸다. 에버렛은 남자를 때리던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웅얼거렸다.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지 마.”

“내가 미안하네, 에버렛..”

 

안아주었던 손을 풀어 남자는 에버렛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잠시 쓰다듬어주며 서로 입을 닫았다가 남자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그의 왼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손등에 입을 맞추며 눈을 바라보았다.

“에버렛. 에버렛 로스.”

“갑작스럽지만. 내 말을 들어줄 수 있겠나?”

“말하세요, 마법사 양반.”

 

“WILL YOU MARRY ME?”

 

“말하는 게 너무 늦어.”

 

에버렛은 남자의 손을 잡으며 볼에 키스를 했다. 그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은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결혼을 승낙했다. 오늘은 7월 14일. 연인이 돌아온 날이자, 서로의 미래를 약속한 실버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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