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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원했던

​브레이커님 (@SJBreaker)

엉성한 만듦새의 의자엔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었다. 과연 묶여 고문당한 기억을 지닌 이의 거실에 어울림직한 세간이라 하겠다. 거기에 권해져 앉은지도 벌써 십 분째, 길럼은 아직까지도 마땅하게 여겨지는 자세를 찾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동료이자 오랜 친구 닉은 마찬가지의 꼴로 사이에 탁자도 없이 길럼의 맞은편에 자리해 있었는데, 골몰하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부터 고개를 들어올리곤 길럼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길럼은 저도 모르게 시계를 향하는 시선을 채 막지 못했다. 아, 시간은 넉넉했다. 가봐야 하겠다며 일어날 수도 없을 뿐더러, 일을 빨리 진행하라고 재촉할 수조차 없는 그런 시간. 그의 구두 앞굽이 초조하게 나무바닥을 두드렸다. 굳어진 표정과 힘이 실려 각이 진 턱 아래에서는 밝은 푸른색에 금색 광택이 도는 넥타이조차 그 생기를 잃었다.

꽤 지루한 시간을 얼마간 더 흘려보내고서야, 안쪽의 너덜너덜한 문이 열리며 얼굴을 짧고 투명한 베일로 가린 신부가 나타났다. 꽤 정성을 들였을텐데도 옷매무시는 엉성했다. 움직여지지 않는 오른손을 제외한 한 손으로 모든 단장을 하려니 그럴만도 했다. 총상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의 절반을 절룩이는 그녀를, 닉이 재빨리 달려가 부축했다. 그들은 길럼의 앞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의자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초조한 기색의 그들은 그러나 서로에게 뻗은 손 한 쪽씩을 허공에서 맞잡고 눈을 맞춘 채 긴장된 미소를 교환했다.

“알겠지만 난 여전히 이게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해.”

길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신부와 신랑의 열없는 눈 두 쌍이 동시에 길럼을 향했다.

“알아. 하지만 오늘 우리는 남편과 아내가 될 거야. 사제가 없는 곳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더라도...”

“닉이랑 난 반지를 교환하고 입맞출 거야. 그리고 난 일평생을 충실한 아내로서 살아갈 거라고 맹세해.”

“길럼, 증인이 되어주겠다고 말해 줘. 지금.”

“나는......”

길럼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친우를 괴롭게 응시했다.

“난 아무것도 담보할 수 없어, 닉.”

“그저 오늘을 기억하겠다고 말해 줘. 우린 영원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영원하다는 걸 세상 누군가 한 명쯤은 알아줬으면 하는 것뿐이야.”

“우리 손을 잡고, 반지를 건네줄 수는 없는 대신 우리를 축복해 줘.”

여전히 구불거리는 아름다운 머릿결을 한 신부는, 그녀가 다치기 전을 포함해 그 어느때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길럼은 긴, 끝나지 않을 듯한 한숨을 오래도록 내쉬었다. 그리고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양 손을 손바닥을 위로 해 모아 들어올렸다. 그 위로 곧 자살 임무에 뛰어들어 죽게 될 운명의 신랑과, 이미 전쟁으로 부서진 몸을 한 신부의 화상자국에 뒤덮인 손이 놓였다. 길럼의 입이 열렸다. 그의 말이 이어지며 듣는 이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축복한다. 닉, 내 앞의 내가 알던 누구보다도 영민한 이. 언어의 달인이자 원하는 모든 말을 훔치는 자. 취하거나, 취하지 않은 상대가 걸어온 모든 싸움으로부터 이긴 자......


 


 

아직 어두웠지만 이미 아침이었다. 근무일이었더라면 보고서 작성을 막 마쳤을 시간. 길럼은 반쯤 피운 담배를 곁의 빈 맥주병 속에 털어넣어 껐다. 붉게 밧줄 자국이 남아있는 팔의 피부가 당겨져 따끔거렸다. 그는 어느덧 담뱃재 약간이 흩어져 있던 맨 가슴팍을 살폈다. 가느다란 케인으로 맞은 자국이 너른 흉판에 어지럽게 수놓여 있었다. 길럼은 손바닥을 써서 그 위를 조심스레 털어냈다. 그리고 기대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떨어져 밤새 구겨져 있던 바지를 주워 입고는 연인의 옆모습을 향해 슬리퍼를 끌며 다가갔다.

딕슨은 양 손을 유리창에 붙이고 서서 비를 뿌리는 하늘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를 잘 몰랐던 과거였더라면, 길럼은 딕슨이 잠에서 깬 연인더러 보라고 부러 사랑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거라 오해했을 것이다. 그러기엔 딕슨은 꾸밈이 없는 이였다. 음흉한 속내를 감추는 법이 없었다, 그는 가지고 있는 패를 전부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이상스러운 순진함이 언제나 길럼의 마음을 끌었다. 딕슨의 작은 손가락들엔 마디마다 거친 흉이 져 있었다. 길럼은 등 뒤로부터 딕슨의 양 손을 얽어 쥐어, 낯익은 지도 위를 더듬는 것처럼 엄지의 배로 느리게 쓰다듬었다.

“저 많은 물이 어디서 떨어지는 거야?”

딕슨은 내내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알파벳 철자를 배우기도 전부터 장화 굽에 나이프 날을 닦고 뒷세계를 전전했다는 그는, 알고보면 놀랍도록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걸 아무에게도 티내지 않았고 길럼에게도 마찬가지였으나 잠자리를 세 번 같이 한 다음부터 마른 어깨를 곤두세운 채 하나둘 천진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었다. ‘노을은 왜 붉은 색이지?’ 이럴 때면 마치 길럼은 정글북에 나오는 진귀한 늑대 소년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이 수증기가 되는 건 봐서 알고 있겠죠.”

“그게 그렇게 되나?”

“수증기가 너무 많이 만들어지면, 올라가서 저렇게 검게 하늘을 가립니다. 그리고 다시 물이 돼서 떨어지고.”

유리에 맺힌 상으로 딕슨이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이해가 안 돼.”

그의 총을 쥐는 손바닥은 단단했다. 해머를 당기는 엄지에 굳은 살, 집게손가락 사이 우묵한 곳에 쇠지렛대를 휘두르다 찢긴 상처. 이 놀랍도록 순진무구한 악마는 땅 밑 지옥 출신이라 아득한 하늘 위의 일에 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길럼은 딕슨의 막 씻어서 인공적인 향기가 나는 정수리에 코를 묻어 욕심껏 숨을 들이마셨다.

“이해할 필요 없어요. 알든 모르든 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리니.”

“검은 색을 탄 물을 많이 끓이면 검은 비가 내리기도 하나?”

창가로부터 침대를 향해 연인을 이끌어 가며 길럼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 식으로는 안 되죠.”

“대체 그런 일들엔 왜 일관성이 없는 거지? 그건... 대가리를 터뜨렸더니 뇌수 대신 깃털이 뿜어져나오거나 하는 거랑 똑같아. 그런 식이면 아무리 나라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겠지.”

깃털 베게에 머리를 뉘며 하는 말이었다. 길럼은 그 모습에 시선을 고정해둔 채 느리게 곁에 누웠다. 딕슨은 검은 비나 뇌수 같은, 그런 비뚤어진 것들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널 잘라서 나누고 싶어.’ 그의 표정은 간밤의, 제어를 잃고 케인을 휘두르던 고양된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한 번에 조금씩... 네가 없어진 부분들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도록.’ 아, 제발 그렇게 해 줘요. 그 생각이 입 밖에 나가지 않도록 자신은 잘 제어해 냈던가? 굴러가는 생각에 휩쓸린 길럼은 충동적으로 딕슨을 짓눌러 씨름을 걸었고, 딕슨은 즉시 호전적으로 응해 왔다. 그들은 장난치는 형제 늑대들처럼 엉켜 침대 위를 뒹굴었다. 금세 수세에 몰린 딕슨이 야비하게도 어젯밤 길럼의 몸에 남긴 상처들을 찔러대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길럼은 치밀어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마치 조정 보트의 노를 저을 때처럼 샛노란 아드레날린이 신경계를 달구고... 그의 양 손이 딕슨의 팔목을 침대 위로 찍어 눌렀다. 딕슨의 가슴과 배, 그 외의 약점까지 길럼 앞에 훤히 드러나 있었다. 간단히 제압당하고 만 가소로운 맹수는 별반 아쉽지도 않은 듯 온 몸의 힘을 빼고 늘어지는 것으로 항복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열 없이 물었다.

“너 무슨 일로 우울한 거야? 내 말은, 넌 나랑 있을 때 항상 음울해 보이지만, 지금은 앞으로 우리가 만나 떡치고 재미 볼 수 있을 날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꽃점보는 소녀마냥 헤아리는 중인 것 같지는 않아서.”

“그 정 떨어지는 표현에 화내는 걸로 시간낭비 하지는 않을게요. 내가 우울해 보여요?”

길럼은 딕슨의 양 얼굴을 손 안에 쥐고 가까이 다가가 미소를 꾸며 보였다. 딕슨은 대답 대신 길럼의 귓가를 어루만진 뒤, 곧 꼬집어 당기며 입술에 진하게 키스하곤 떨어졌다.

“이뻐 보이네.”

“고마워요. 당신도 그래요.”

딕슨은 식사를 하고 난 짐승처럼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검은 비가 내리냐고? 엉뚱한 질문을 되새기며 길럼은 마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길럼이 상대가 아니었다면 딕슨은 이런 궁금증을 누굴 상대로 풀었을지에 대해... 딕슨을 비웃거나, 혹은 상냥하게 가르치는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건 놀라우리만큼 질투가 나도록 하는 불쾌한 상상이었다. 길럼은 이끌리는대로 딕슨의 허리를 한동안 어루만진 뒤, 애써 떨쳐내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나가 봐야 돼요.”

길럼이 신선도가 다소 의심되는 머핀을 두 입만에 해치우고, 샤워를 하고, 전날 골라둔 수트를 입고 거울 앞에서 타이를 매는 동안 딕슨은 길럼이 내버려두고 떠난 그대로 드러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길럼은 거울 가장자리를 통해 그를 줄곧 관찰했다. 딕슨의 밀려 올라간 까만색 상의 자락 아래 움푹 꺼진 배와 마른 허리는 시체처럼 창백한 색이었다. 길럼은 새삼 작게 혀를 찼다.

“당신 해수욕은 해본 적 있어요?”

“아니. 한가하게 물에 떠다니는 취미는 없어서.”

“다음에 같이 가보죠.”

길럼은 머리 정돈을 끝냈고, 손가락 끝에 향수를 묻혀 구레나룻 위에 가볍게 문질렀다. 딕슨은 길럼의 제안을 듣지 못한 것마냥 완전히 무시해가며 다른 일에 대해 물었다.

“멋내고 뽐내고 써커스보다 재미있는 곳에 가나봐?”

그가, 헥터 딕슨이 정말 궁금한듯 웬일로 써커스를 운운해가며까지 참견을 하는 것이었다. 먼저 딕슨을 돌아보며 별 이상한 낌새가 없음을 확인하고, 길럼은 시계를 차며 답했다.

“재미는 그다지.”

“너는 일만 하는 놈이야. 일만 하다 비명횡사 하는 놈들은 재미가 없더라. 지금 죽이나 다 늙어 죽게 놔두나 사실상 다를 게 없거든.”

“당신이 그런 소리 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뭘 몰라? 가끔 만나서 뒹구는 외에 네가 나한테 할 수 있는 일이 여러가지나 되는 줄 알아?”

길럼은 단장하던 손길을 멈추었고, 퉁명스레 말했다.

“하긴 그래요. 그냥 내게서 필요한 부분만 잘라다 가져가는 건 어때요.”

길럼의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그의 사타구니에 시선을 내린 딕슨이 온 얼굴로 인상을 썼다. 일단 내 거시기를 잘라 가지는 데엔 흥미 없나보군. 생각하고 제풀에 피식 웃어버린 길럼이 분위기를 바꾸어 농담했다.

“당신을 여왕폐하의 이름으로 체포할 수도 있겠죠.”

딕슨은 그 말에 눈을 꿈뻑대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허공을 향해 사지를 쭉 뻗어 올렸다가, 털썩 떨어뜨렸다.

“여왕 폐하 만세! 으음, 깨꼬닥.”

그의 곁으로 가 침대에 걸터앉은 길럼은 몸을 숙여 위험한 연인의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산 채로 탑에 가두라고 해야지. 그럼 내가 가끔 찾아가죠.”

“넌... 느끼한 새끼야. 그거 알아?”

“내가 나가고 나면 또 어디론가 가서 무모한 짓을 할 거죠.”

“그야, 너한테 좋자고 가게에 취직해서 팬케익같은 걸 굽지는 않겠지.”

잘 정돈된 머리를 망쳐놓으려 다가드는 짓궂은 손길을 잡아 밀어내며 길럼은 침대맡의 서랍장 맨 윗칸을 열었다. 그는 거기서 손바닥만한 벨벳 갑을 꺼냈다. ‘왜 하필 오늘인지? 왜 하필 지금이야?’ 이성이 의심스러워하며 속삭였다.... 맞닿은 몸으로 딕슨이 놀라움에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적당한 때란 없었다, 그들에게 더 나은 기회같은 것은 없었다. 달래듯 딕슨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길럼은 솜씨좋게 한 손으로 갑을 열었다.

아무런 장식 없는 밋밋한 반지 한 쌍이 고개를 내밀었다. 길럼은 결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이것에 대해 줄곧 고민해 왔다. 특히 오늘 아침에, 땅에 붙은 모든 사물을 두들겨 씻어내려는 듯한 빗줄기 소리에 눈을 뜨고 나서부터.

“알아요? 나한텐 이런 게 필요해졌어요.”

오랜 생각이 담겨있다 해서 언변이 화려해질 필요는 없었다. 길럼은 말을 더듬어대는 스스로를 그런 생각으로 진정시켜가며, 반지들을 빼내어 손바닥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사라지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은 대신에, 상처를 남기는 관계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 상처는 영영 극복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왜냐하면 당신이나 나나, 고향 방향을 잊은 배같은 꼴로 떠다니고 있으니 말이에요. 우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거예요. 오직 서로에게만 서로를 남길 수 있을 거예요.”

“그것 봐, 내가 너 우울해 보인다고 그랬잖아.”

딕슨은 이마에 온통 주름을 새겨가며 한 손을 길럼의 목덜미에 대 체온을 쟀다.

“나랑 어울리더니 이젠 완전히 맛이 간 거 아냐?”

“당신이 청혼을 진지하게 취급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요. 하지만 받아주겠죠?”

길럼의 손바닥으로부터 더 큰 반지를 가져다 이리저리 들여다본 딕슨은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앞으로 평생 네가 준 반지를 족쇄처럼 끼고, 널 잃었을 때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로 슬퍼하라는 거 아냐. 별 거지같은 요구를 다 보겠네.”

“딕슨, 나와 결혼해요.”

길럼은 딕슨의 손목을 붙들고, 목표하는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결혼한 사람인 채로 이곳을 떠나, 다음 만남때는 나랑 같이 니스의 해변에 가요. 따뜻한 모래가 발가락 틈으로 파고드는 감촉을 느껴보고 나면 당신 그 빌어먹을 직업을 때려치우고 써커스 내의 식당에서 도저히 못 먹어줄 팬케익을 구우며 살아볼 마음이 들지 누가 압니까.”

“엿이나 먹어 피터 길럼. 아아니, 피터 딕슨? 네 함자가 이제 피터 딕슨이 되시는 거냐? 금발의 아리따운 미세스 딕슨... 진짜 구리네.”

길럼이 실실대는 딕슨의 손가락에 허락 없이 반지를 끼워 넣자, 딕슨은 길럼의 손에 똑같이 하는 것으로 실없이 앙갚음을 했다. 작은 금속이 손가락 뿌리를 감싸 죄는 감촉을 느끼며 길럼은 드러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길럼이 마음속으로 은밀히 누벨 마리에, 새신부라 부르는 이는 새로운 털실뭉치를 받은 고양이처럼 반지를 낀 제 손을 붙잡고 뒹굴며 콧노래를 불렀다. 정작 그가 일하면서 받는 보수에 비하면 싸구려임이 분명함에도, 아무튼 반짝거리는 선물을 받아 기쁜 모양이었다. 길럼은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일어서서 코트를 입고, 장갑을 꼈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이 그를 찾아들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더라도...’ ‘우린 영원할 거야.’ 닉은 요하네스버그의 팍팍한 땅덩이 속, 지금쯤은 도로가 깔려 차가 지나다니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곳에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었다. ‘너는 그랬던가, 닉? 너는 영원했나? 신은 네게 훗날 아내를 맞아들일 신방을 연옥 어딘가에 허락하던가?’

두툼한 장갑 아래로 반지의 촉감을 매만지며 맨션 건물로부터 나오던 길럼은 문 바깥 벽에 기대어 서있던 덩치를 발견하고 주춤 멈춰섰다. 딕슨으로부터 파비앙이라 불리는, 실제 이름은 알 수 없는 험상궂은 악한이 언제나와 같은 속이 빈 콜라 병을 연상케 하는 눈으로 길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럼은 잠시 인사를 건넬까 망설였으나 목소리가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자 눈쌀을 찌푸렸고, 곧 무시하고 지나치기로 결심을 고쳤다. 그러나 그의 발이 움직이기 전 악한이 먼저 이를 드러내고 웅얼거렸다.

“널 만나고 딕슨은 물러졌어.”

비난? 원망? 우려? 이름붙일 수 있는 감정이라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서술이었다. 어쩌면 경고의 의미일지도. 하지만 이어지는 말로 단순한 불평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다녀도 전보다 재미가 덜하다고.”

“너도 취향을 좀 누그러뜨려보는 건 어때. 이런 시대엔 단단하면 부러지는 법이니.”

“평화는 젖먹이들한테나 어울리는 거야. 우린 너희와 서있는 땅이 다르다.”

“이 사소한 관점 차이에 대한 대화가 상당히 흥미로워지려는 참이지만, 난 가봐야 해서.”

길럼은 파비앙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드리곤 나아가 처마 끝에서 우산을 펼쳤다. 보도에 서서 돌아보니 덩치 녀석은 총을 차고 있을 가슴께를 자켓 위로 만지작대고 있었다. ‘시정잡배들.’ 수가 틀리면 위협이나 일삼는 저런 암살자 나붙이들을, 길럼은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딕슨을 그들 틈바구니에서 꺼내올 수 있다면... 길럼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머저리같은 그런 꿈을 꾸었다. 언젠가 국가에 대한 봉사를 마치고 스위스 국경에 오두막을 얻을 때, 나와 반지를 나누어 낀 이 있으니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싣게 해 달라고... 차를 타고, 운전을 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뒤섞인 채 떠오르는 상념들로 가득 차올랐다. ‘우린 영원할 거야’ ‘네가 기억해 주었으면 해’ 거세게 뿌리는 비로 도로에 구정물이 넘쳐났다. 길가엔 닫힌 상점들이 즐비했다. 본격적으로 시가지에 접어들자 런던은 누추하고 늙은 얼굴을 점차로 드러냈다. 오래된 배관이 역류하고, 갈라진 벽 틈새로 습기가 스며드는, 부인네들의 걸레질과 청소부의 빗질로나 체면을 유지하는 육중한 잿빛 도시. 신호 앞에 늘어선 차들 곁으로 오래된 극장 간판이 누런 빛을 뿌렸다. ‘오셀로’. 아내의 정절을 의심케 된 영웅은 달리 갖추고 있는 모든 미덕에도 불구하고 가장 천한 자의 술수에 몰락하고 말았다...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까?’ ‘우린 영원할 거야’

도착한 교회 건물 아치 입구엔 폭우에 반쯤 너덜거리는 웨딩 장식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를 지나, 짧은 걸음에도 흠뻑 젖어버린 구두 바닥을 깔개에 턴 길럼은 발소리가 서늘하게 울리는 석조 복도를 걸었다. 이윽고 그는 이미 하객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성전이 들여다보이는데까지 다다랐다. 길럼이 보아 아는 인물들이 늘어선 짧은 줄이 있었고, 신랑과 신부는 성당 입구 대신 이곳에서 그들과 악수와 포옹을 주고받으며 손님맞이에 한창이었다. 길럼은 부러 인기척을 감추고 침묵을 지키는 채 차례를 기다렸다. 한 번은, 신부의 눈이 길럼을 발견하고는 이채를 띠었다가 곧 그런 적 없었다는 듯 떨어져 덕담을 건네는 하객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길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곧 길럼의 차례가 왔고, 보아하니 그가 마지막 하객이었다.

“축하해, 로라. 신랑께서는 오늘 귀한 보석을 얻으시겠습니다.”

몸의 반쪽이 불편한 신부의 팔을 부축하고 서있던 신랑이 까만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간병인이자 물리치료사인 그가 환자와 사랑에 빠져 치료에도 성과를 얻고 결혼에도 성공한다는 톨스토이적인 스토리가 이 결혼식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신부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인상적인 갈색 눈이 길럼을 쏘아보다 넘쳐나는 눈물에 젖어드는 것을 길럼은 똑똑히 들여다보았다.

“네가 올 줄 몰랐어.”

“초대장을 받았어. 몰랐나본데, 보통 그러면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거든.”

“무모한 짓은 하지 않길 바라겠어.”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도 분명하게 말했고, 그녀의 신랑이며 들러리가 손수건을 꺼내들고 호들갑을 떠는 틈에 파묻혀 짧은 사이에 온통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숨겼다. 적대적인 만남은 그리 짧고도 싱겁게 끝나버렸다. 길럼은 자신의 등장이 불러온 이런 소란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애석함을 느껴가며, 그는 성전의 긴 의자에 자리했고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십자가상을 마주했다. 조금 앞쪽 줄에 스마일리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컨트롤의 자리를 이어받은 뒤로는 거의 교류한 적이 없었다. 한때는 매우 가깝다고 느꼈었는데. 그같은 자는 무엇에 대해 기도할까? 아무것도. 아마 최근들어 주변에서 그의 건강을 염려할 만큼 부쩍 잠이 늘었다고 하니만큼, 신랑의 입장이 늦어지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막간을 이용해 졸고 있는 것이겠지. 그가 방심한다고 해서 그의 몫의 잔에 독을 탈 이도 지금 시점에는 남아있지 않다. 언젠가 로라는 길럼에게 자신이 종교적인 타입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사제의 손이 머리에 놓이면, 손발이 의자에 묶인 채 알루미늄 모자가 씌워지던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기나 할 거라고. 그것은 한때 심각한 농담이었다. 사소한 모든 것들이 심각하고 침울하던 시기. 하지만 이곳의 모두가 과거를 떨치고, 과거의 사연은 각자의 무덤에 넣어 닫아둔 채 오늘의 신성한 결합을 축복하고 있었다.

길럼은 어지러운 오르간 연주와 박수 갈채 소리에 귀가 먼 채로 손에 낀 반지를 붙잡고는 이를 악물었다. 과거가, 약속이 이토록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라면 오로지 단 하나, 그가 스스로 붙들 수 있는 것만이라도 손에 쥔 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 맹세합니다.”

신부의 목소리가 울렸다. 헥터 딕슨, 검고 긴 가시로 된 융단같은 그의 벌린 팔 안으로 무너지는 상상을 하며, 길럼은 스테인드글라스 바깥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에 얼룩지는 흐린 빛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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