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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임페리얼

담님 (@sherrrlokced)

*칸이 다크니스 이후 다시 동면에 들고, 그렇게 우주를 떠돌다 지구가 터진 후 여행을 다니던 아서와 만나는 이야기

 

그렇게 세계는 굴러가는 듯했다.

 

물리적 실체 중 우리가 원칙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서 덴트는 그럼에도 평생을 써도 모두 탐사하지 못할 멀티 유니버스, 지구인들이 일컬어 우주라 부르는 광활한 풍경에 대해 은근히 로맨틱한 감상을 지니고 있었다 - 물론 이것은 지구가 폭발하기 전의 일이다. 아서가 웨스트 컨트리에서의 지루한 삶을 이어가던 아주 까마득한. 안내서의 개정판 작업이 끝나기도 전의 일이라, 아서 덴트는 모든 것이 사실 소용 없는 공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아주 가끔, 그가 유영하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 1레벨의 멀티 유니버스 속에도 그와 같은 생명체가, 꼭 닮아 다른 삶을 이어가는 그런 존재가 있을까 의아할 뿐이었다. 말 뿐이었지 한번도 그런 것은 관찰한 적 없으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물리학 이론에 전혀 비할 바가 되지 않는 존재가 과연 어떻게 그에게 영향을 끼칠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며 아서 덴트는 그가 정해놓은 시간에 조용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티타임을 보내곤 했다. 이 우주 어딘가에 나와 같은 존재라. 그런 존재를 보지 못한 건 그곳에서의 정보가 닿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아직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2레벨로 넘어가볼까.

아니, 넘어갈 수 있을까.

 

머무르던 행성의 성대한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웨딩가터를 착용한 채 아서는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하얀 가운을 입고 들렀다. 이곳의 결혼은 그가 살던 별과는 조금 다르게, 참석한 모든 지인들이 하얀 아이템을 착용했고 그게 그 별의 예의였다. 당시 아서는 그 별에서만 재배하는 식용 허브의 씨앗을 마음 호 속에 마련한 작은 텃밭에 키울 생각이었기 때문에 작은 별 내의 대대적인 행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이라, 어떤 지속적인 약속이든 오래 가기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그와는 꽤나 거리가 먼 이야기였지만 타 행성에서 일어나는 결혼식은 나름대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만약 그가 보지 못하는 어느 곳에 자신과 같은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똑같은 아서 덴트에게는 한번쯤 경험시켜주고 싶을 정도로. 아서는 그곳의 허브로 만든 찻잎을 그날의 주인공에게 선물했고 지구인의 특이한 선물에 행성인은 꽤나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 찻잎이, 방금 아서가 우려낸 C13, 스트로베리 향의 차였다.

 

그가 선택한 이름은, 웨딩 임페리얼.

 

그가 알고 있는 차 종류인 웨딩 임페리얼과 이 가향차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었지만 어쩐지 아서는 C13에 그런 이름을 훔쳐와 붙여주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곳의 웨딩을 구경했으니까. 이름으로라도 남기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 기억은 흐릿흐릿하고 말랑말랑해져 해마의 어느 구역 속으로 숨어 이내는 사라질 게 뻔했으니.

 

공간과 시간이 팽창되는 사소하고도 커다란 우주 한켠에는 아서 덴트가 조종하는 순수한 마음 호가 있었다.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아직 완벽하게 연구되지 않아 세계가 뒤틀릴까 시행해보지 못했기에, 1레벨 사이에 만들어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은 아직 아서도 제대로 겪은 적이 없었다.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를 작동시키면 가능하겠지만. 하물며 완전히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4레벨이야,

 

“......어.”

 

끊임없는 공상으로 시간을 보내던 바로 그때 아서 덴트가 발견한 것은, 창공을 떠도는 어떤 육체였다. 인간이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왔을 거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겨우 하나가 들어갈 법한 인공 동면 캡슐 속에 몸을 담은 생명체. 밀리웨이즈에 있는 자포드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으니, 현재 마음 호에 생명체라곤 아서 하나가 전부였다. 아주 많은 경우의 수를 다루어 보았지만 인간이 아닌 종족과의 우주 1:1 만남은 처음이었기에, 아서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육체는 인간처럼 보이는데... 애초에 인간은 냉동인간으로 삶을 영위하는 기술 개발을 성공한 적이 없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전자 조작 덕분이었을까? 방법이 조금 궁금해지는데.

 

게이트를 열어 그 사소한 우주선을 마음 호 안으로 들인 아서가 안에 든 생명체를 찬찬히 관찰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기에는 꽤나 위험한 상황일지도 몰랐지만, 이미 돌아갈 행성을 남기지 않은 아서로서는 어떻게 되어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다만, 오랜 여행을 거쳐온 그의 예감 상 스트로베리 향 홍차를 홀짝이며 쓸데없는 상상을 펼치던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티타임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우주선 파괴로 인생을 마감하는 건 그가 해온, 우주의 두뇌 쥐를 앞세운 탐험보다 훨씬 시시한 끝이었고 우습지도 않은 아주 심심한 삶에 속했으니 더더욱 바라지 않았고. 그 캡슐 속 얼굴은, 보통 캡슐이 우주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추방하던 대표적이고 고전적인 방식이긴 하니 많은 일을 겪었겠지만 자신을 해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 건지, 아서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지구가 박살나기 전에 갇힌 걸까? 그럼, 상상은 가지 않지만 제 조상이라도 된단 말인가? 한 행성이 또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생명체는 어떤 감정을 보일까. 거기, 이제 막 완공되는 초공간 우주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끝이 없이 이어지는 궁금증에, 아서는 캡슐 바깥에 빤히 보이는 빨간 버튼을 눌렀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지만 그리 긴장되진 않았다. 마음 호에 있는 것 중 자성이 강력한 기기로 몇 번 누르자 푸시식 소리를 내며 삑삑거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래, 언제나 이런 곳에선 빨간색이 한몫을 하기 마련이지. 예상과 다르지 않게 급속도로 캡슐 내의 환경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였고, 이내 그의 얼굴 위를 덮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열렸다.

 

그리고 뒤늦게 아서는 생각했다. 앗, 캡슐 내 생명유지장치도 끊긴 것 같은데. 마음 호 속의 공기 구성이 이 생명체와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캡슐을 주운 것은 순수한 마음 호였고 우주에선 주운 사람이 임자였다.

 

“제임스 커크...!”

 

체력이 좋은 건지 뭔지, 다행히 숨을 쉬는 법을 잊지 않아 금세 깨어난 ‘인간’ - 아서는 그 생명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통역기기 없이 같은 언어를 쓰고 있으니 일단 인간일 것이라 예상했다. - 은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이름을 불렀다. 애인인가? 깨어난 이의 생각을 알고 싶었지만 그의 눈을 차지한 것은 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감정들의 파편 뿐이었다. 차였나?

 

낯선 환경에서도 유일한 도움이 될 그에게 전혀 집중하지 않는 듯한 그 생명체에게 은근한 짜증이 치밀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이에게 대뜸 화를 내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그다지 옳은 태도는 아니었다.

 

“안녕.”

 

그래서 아서는, 그 인간을 보며 해맑게 인사했다. 순수한 마음 호에 걸맞은 인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은 우연 아닌 우연일지 몰라도 어쨌든 앞으로는 그와 함께 생활하게 될 테니까.

 

“너는....”

“여긴 순수한 마음 호, 전 아서 덴트입니다. 캡슐이 둥둥 떠다니길래 데려왔는데,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죠? 음, 자기소개가 필요할 것 같은데.”

“엔터프라이즈 호는...”

 

어벙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며 아서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역시, 지구가 터지기 전 인간이라면 이야기할 거리가 꽤 있지. 혹시 홍차를 좋아할까? 생긴 건 우리 쪽 사람 같다. 혹시 영국 국적? 이 드넓은 우주에서 영국 국적의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를 만나는 건 사실 운명이 아닐까? 오, 세상에, 하느님.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당신 꽤 오래 그 안에 있었어. 지구가 사라진 건 알고 있어?”

“지구가 사라져?”

 

멍청한 얼굴이 생각보다 보기 좋았다. 낮은 목소리는 더더욱.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불운의 끝에 있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된 저 남자도 불행이라면 한 불행하는 모양이었다.

 

사라진 지구의 후배를 만난 기념으로 아서는, 넋을 놓은 얼굴로 막 깨어나 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차를 끓여주기로 했다. 포트는 차를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 했지만, 의지의 아서 덴트는 은하수를 유영하는 동안 온갖 행성에서 구한 식용 허브 비슷한 것들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말려 우려내는 실험을 지속했고 나름대로 각자의 맛에 번호와 별명을 붙였다. 오늘의 가향차도 그 중 하나였다. C13. 음, 아무래도 행성이 사라졌단 소식을 들으며 입맛이 돌기란 쉽지 않을 테니 입맛이 돌도록 나름대로 새콤한 차가,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했다.

 

“차, 좋아해요?”

 

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딱히’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차가 어떤 건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우주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티타임 친구를 만나다니! 괜히 설렜지만 우주의 히치하이킹에 있어서는 선배답게, 아서는 티내지 않기로 했다.

 

“지구가... 어떻게 터졌지?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야?”

“초공간 우주로를 만들어야 해서 폭파시켰지. 난 운 좋게 살아남은 거에 가까워요. 이 바닥에서 지구인 만나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우생학 전쟁에 대해 알고 있나?”

“그런 건 들어본 적 없는데.”

“강화 인간은.”

“음, 옛날 일인가 봐. 난 역사에 약하거든요.”

 

대수롭지 않게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행성이 다른 행성을 몰살시키는 것은 퍽 흔한 일이었다. 당장 그의 그리운 푸른 별도 길을 뚫는답시고 터트려 사라지지 않았던가. 평온해 보이는 아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칸.”

“음?”

“칸 누니엔 싱.”

“그게 당신 이름이야?”

 

칸. 입에 붙지는 않으나 나쁘지 않은 발음이다. 칸, 칸. 몇 번 그 이름을 발음하던 아서는 따뜻한 잔을 들고 앉아 물끄러미 그 잔 속의 붉은 차를, 꽤나 상큼한 향이 나는 그 컵 속의 물질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칸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잘해봐요, 칸.”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덧붙이지 않은 말을 떠올리며, 아서는 손을 내밀었다.

 

길고 아득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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